오늘 대신 봐 드릴 작품은 발디마르 요한 감독의 2021년작입니다. 강력한 스포가 존재하니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1. 들어가는 말
"집을 등지면 항상 산이 보인단다. 집으로 향할때는 그 반대지. 산을 등지게 된단다."
인류 역사는 갈등의 역사다. 그중에서도 우리 존재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갈등은 인간 대 자연의 갈등일 것이고,
인류라는 하나의 종으로서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착취해 왔다는 우울하고도 부끄러운 사실은 결국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기후, 생태계 또는 기타 생물체에 관계없이 인류는 염치를 모르는 지배자였다.
종종 이러한 일종의 죄악감은 종교적인 열광으로 표현되어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녹아드는데, 가령 유명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던가, 아바타와 같은 작품이 있다.
우리는 결국 세상의 손님일 뿐이라는 사실에 경종을 울리는 위의 작품들처럼, 발디마르 요한슨 감독 역시 종교적인 모티프로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조명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슬픔과 공허함, 그리고 이를 채우려는 인류의 욕망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는 영화. 램이다.
2. 소개
발디마르 요한슨 감독은 영화의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얻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램(Lamb)의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전해졌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램의 모티프인 거대한 숫양들의 이미지는 감독이 아이슬란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써둔 일기장에서 출발했다. 어느 날 어머니를 통해 그의 십 대 시절 일기장을 얻게 되었는데, 감독의 수많은 꿈을 적어둔 그 일기장에서 거대한 숫양들이 들판을 돌아다니고 있는 이미지의 기록을 확인한 감독은 20여 년이 만에 영화 램에서 이 이미지를 화면 속에 풀어내었다.
감독은 영화 램을 초현실적인 요소가 있는 가족 드라마로소개한다. 실제로도, 램은 공포 영화로 부적절하게 광고되었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기이함과 혼란을 겸비한 드라마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3. 줄거리
처음봤을때는 순간캡쳐인 줄 알았다
"원하는대로 오래 머물러도 좋아. 그러나 우리 가족에 대해서 참견하지는 말아 줘"
마리아와 그 남편 잉그바르는 눈 덮인 아이슬란드 교외의 한적한 농장에서 단 둘이 살고 있다. 물론 축사에는 양들이, 집에는 개와 고양이가 함께 살고 있지만, 이들은 모두 부부에게는 한낱 축생일뿐이다.(실제로 부부는 개와 고양이, 그리고 양에게 이름 따위를 붙여주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불명확한 우울함이 부부를 둘러싸고 있지만, 이는 영화에서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다.그러나 그들의 일상의 업무를 행하는 와중에 불현듯 보이는 행동이나, 표정 등에서 오묘히 묻어나기도 하며, 시간 여행에 대해 가지는 부부의 대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인다.
어느 날 양 중 한 마리가 어린양의 머리와 인간 아이의 몸을 가진 아기를 낳으면서 본격적인 서사의 시작이 이뤄진다.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겁에 질리거나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부부는 이 반인 반수의 아이를 기괴할 정도로 자연스럽게도 행복의 기회로 본다.
아이의 이름을 아다(Ada), 죽은 자신들의 아이 이름에서 따온 부부는 아이를 친자식과 같은 열정으로 키운다.
반인반수의 어린양을 통해서 얻어진 새로운(또는 과거에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린) 행복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부부. 특히 부인인 마리아는 매일 새끼양을 그리며 울부짖는 어미양을 무참히 살해하는 등 점차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새로운 기쁨은 그 기괴한 비일상에 내재된 불안감에 조용히 흔들린다...
4. 포인트와 한계
"누가 어린애라는 거요? 짐승과 가족놀이를 하고 있잖소."
램은 소위 무서운 작품이 없는 공포영화로 잘못 마케팅되어 오히려 저평가된 영화다.물론 근원적인 호러(최소한 으스스한 분위기)는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공포라는 장르적 특이성보다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영화는 반인반수의 잡종이라는 자극적인 설정은 이에 혹해 영화관을 찾을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 같기도 하다.영화의 대부분은 부모가 된 마리아/잉그바르 부부의 모습과 아다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다.터무니없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결코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
아다의 존재는 일종의 기독교적 모티프다. 마리아, 성경의 동정녀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찾아온 아이, 자신의 아이면서도 자신의 것이 아닌, 자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보이는 아이와, 아이를 갈구하는 자연은 분명히 예수에 대한 은유를 영화 전반에 깔아주고 있다.
아다가 구원자 예수를 상징한다면, 최후의 순간 부부를 찾아와, 과거 마리아가 했던 방식과 철저히 같은 방식으로 남편 잉그바르의 목숨을 앗아가는 숫양의 존재는 신, 즉 자연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면서 인간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는 인간과 신, 즉 자연을 이어주는 존재였고, 인간들은 그런 그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여 구원자로 섬겼다.
아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자연의 아들이며 인간의 아이가 되었다는 점에선 예수와 동일하나, 마리아와 잉그바르는 그와 자연을 단절시켰으며 심지어 그의 진짜 어미를 그를 그리워한다는 이유로 잔혹하게 살해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아다를 짐승으로 간주한 퓌에튀르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자연의 대리인을 소유하려 한 대가는 지엄했다. 아다와 같은 반인반수의 존재, 그러나 순수한 아다의 모습과는 달리 공포스러운 얼굴을 한 또 다른 대리인이 나타나 부부를 벌한다.
"당신이 엄마를 쏴 죽인 걸 아다가 알아?"
발디마르 요한슨이 이 단란한 가족에 대해 설정한 단란하고도 비극적인 서사는 그다지 깊이 있지 만은 않은, 어찌 보면 고루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다.
특히, 이기적인 인류의 모습을 극적으로 조명하는 연출과 어떤 수단을 써서든 달성하고자 하는 인류의 지배욕에 대한 영화 전반의 우려는 자칫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물론 영화 전반에서 이러한 주제에 대한 깊은 아이디어와 고민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영화는 너무 느린 템포로 주제의식을 모호한 표현의 중심에 가져다 놓았다. 때문에 청중은 그 중심에 있는 주제에 대한 의미 있는 탐구보다 영화에서 보이는 숙련된 미학과 톤을 우선시하게 된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독창성이 영화의 상대적인 깊이 부족을 거의 만회한다.
영화 전반에서 보여지는 자연주의적이고도 목가적인 이미지, 그리고 공포스럽거나 기괴한 이미지의 표현은 독특하고도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5. 결론
귀엽긴 하다.
모두가 예상했던 마음을 휘젓는 공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증되고 진정한 주제를 취하고 있는 영화이다.
또, 그것을 표현하고 연출하는 방법에서는 특별함마저 느껴진다.
우리가 예고편을 보고 기대했던 것만큼 무겁고도, 진중한 주제의식을 담은 섬세하고 진지한 영화이기도 하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 날카로운 느낌의 공포감과, 기이함을 살려서 그 진중한 주제의식을 풀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할리우드의 대중성을 의식하거나 작가주의적 시선에 눈을 돌리지 않고서도 충분한 자극을 청중에게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시각적 즐거움과 충격, 그리고 무수한 해석의 관점을 남긴다.
동화 같은 서사와 기이함, 그리고 무거운 주제의식을 독창적으로 풀어냈다는 특장점이 있는 영화, 램이었다.